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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독서

[추천도서]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하다 라는 의미로써 카톨릭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개신교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정신'이란 근대 유럽에서 발생한 자본주의 개념으로서 이윤 추구를 위한 영리활동을 개인의 소명 또는 의무로 여기며 이것의 달성을 위해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

막스베버의 이 저작은 종교가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확장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으로써 수많은 비판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의 고전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막스베버는이 책에서 개신교도들이 현세적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된 생활양식을 실천했고, 이윤 추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카톨릭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는 달리 현세에서의 직업 노동 또는 상업, 기업활동을 통한 이윤 추구는 하느님이 맡긴 일을 해내는 소명으로 여기며 경제적인 성공을 구원에 대한 확증으로 여겼는데 이런 개신교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탄생시킨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

과거 16세기, 17세기에 유럽에서의 종교적인 영향력이 일반 시민에게 미친 영향력을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개신교의(칼뱅주의) 종교적 윤리가, 축적과 증식 그리고 이윤으로 특징 지어지는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 자본주의에서 요구하는 특유의 정신을 모두 반영하고 있어 자본주의 정착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이 책에서 수 많은 자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부분이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생산수단과 생산관계)에 따라 상부구조(법률, 예술, 문화, 종교, 철학, 교육등)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발생한 자본주의와 정신과 이를 통하여 성장한 자본주의 질서가 이미 전 세계를 장악하여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베버 생존 당시의 상황을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금욕적인 종교적 특질에서 발생하고 성장한 자본주의가 이제는 경제적인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이 세계 속에 태어나 편입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가하여 그들의 삶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생활 양식으로 주조해 내고 있고, 재화에 대한 관심이 강철로 만든 쇠창살이 되어, 재화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그 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역사속에서 승리해서 하나의 강력한 틀과 기제로 자리잡은 자본주의는 금욕주의라는 지지대도 소명으로서의 직업 사상도 영리 추구에서의 종교적인 의미도 사라져 영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순전히 "경쟁욕"과 결부되어서 마치 스포츠를 하는 것처럼 되었다.] 라고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 정신을 연구하였지만 자본주의의 불편한 현실까지도 함께 인식하고 있었던 베버가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이 책에서의 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남기려고 한다.

미래에 누가 이 쇠창살 안에 갇혀서 살아가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이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발전이 끝나갈 무렵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새로운 예언자들이 출현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옛 사상과 이상이 다시 부활하여 강력한 힘으로 발휘하게 될 것인지,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자포자기 상태에서 극도의 자존감으로 장식된 기계적이고 화석화된 인류가 출현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본문에서]
"돈 욕심"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존재해왔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비록 돛이 불에 그을리는 한이 있어도 지옥을 향해 항해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던 네덜란드인 선장처럼 돈 욕심에 사로잡혀서 돈 버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정신"을 "대중 현상"으로 탄생시킨 신념이나 태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용인된 것에 지나지 않았던 활동이(이윤추구 활동)어떻게 해서 벤저민 프랭클린이 보여준 것과 같은 "소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적 신앙과 종교적인 삶의 실천을 통해 형성되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방향을 설정해주고 그런 생활양식에 확고하게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 "심리학적 동력들"이다. 이 심리학적 동력은 상당 부분 독특한 종교적인 신앙 개념으로부터 생겨났다.

칼뱅주의는 하느님에 의해 영원 전에 예정되어 세상에 보내져서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다해야 하는 "세속적인 성도들의 귀족주의"로 변화시켰다.

칼뱅주의의 저 무시무시한 예정론 속에는 신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절제하는 삶을 만드는 동력이 존제했다.

목회적인 돌봄이나 교회의 치리와 규율, 설교를 통한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오늘날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던 시대여서, 목회 실천을 통해 행사되었던 종교적인 힘이 "국민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너를 비롯한 모든 삶들의 영혼에 해롭지 않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 길을 네게 알려 주셨는데도, 네가 그 길을 거부하고 더 적은 이윤을 내는 길을 택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네게 소명을 주신 목적 중의 하나를 포기해 버린 것이고, 하느님의 청지기가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며,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을 받아두었다가 하느님이 필요로 할 때 사용해야 할 의무를 버린 것이다. 육체의 욕망과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합당하다.
(청교도들의 이윤 추구, 돈벌이에 대한 인식)

경제 분야에서 막강한 영항을 미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된 요소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은 직업 노동이야말로 하느님이 개별 신자들에게 준 "소명"이고, 개별 신자들이 자신이 구원받은 자인지를 확증하는 최적의 수단, 아니 유일한 수단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관점이 신자들의 심리적 동력이 되게 만든 것이었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개신교적인 금욕주의는 기업가의 이윤 추구와 부의 획득도 "소명"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렇게 특별한 노동 의욕을 갖추게 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