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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독서

[추천도서]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글.안토니오 알타리바/그림.킴)

 

가장 많이 변절한 이들은 전쟁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이들이다.

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단순히 지난날의 이상을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절은 고백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겨 둔 개개인의 비극을 배신하는 짓이다... 아니 배신이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자살을 의미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묻어야 했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선 마음을 죽여야 했다.

결혼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이 죽음과 같았다... 그동안 지켜왔던 자존심과 사상을 매장시키는 일이었으니....하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많은 스페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시체처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어떻게 아들에게 이미 패배당했고 또 여전히 탄압받는 사상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것으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치를 수도 있는데...
이것이 침묵 속에서 계속되던 형벌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벌이었다. 내 아들에거 내 생각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애초부터 이길 가능성이 없는 탄원을 한 까닭은 오로지 그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양로원에서)방문객들이 오는 횟수는 무척 중요해서 그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 가장 많은 방문객이 있는 사람은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폴리토에 따르면 그건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 유언장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어느 아니키스트의 고백 본문에서]

 



이 책은 2010 스페인 국립 만화대상, 28회 바르셀로나 살롱 델 코믹 3관왕, 2010 카탈루냐 만화대상 등 출간되던 해에 스페인에서 만화 관련 상을 거의 독식한 작품이다.

1910년 스페인의 사라고사에 있는 페나플로라는 농촌에서 태어난 이 책의 주인공은 2001년 양로원 건물에서 스스로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1910년~2001년. 이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한 명의 스페인 청년이 감내해야 했던 역사의 소용돌이는 오로지 살기 위한 끊임없는 힘겨운 투쟁이었다.

평범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도시의 노동자로, 그리고 굶지 않기 위해 군인으로, 뒤이은 사회적 혼란과 이데올로기적 열광에 이은 내전에서 반란군으로 징집되고 곧이은 탈영으로 의용군으로, 전쟁의 패배로 인한 난민의 신분으로 프랑스의 수용소로, 그리고 강제 노역으로, 그리고 독일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로서 삶을 살다가, 스페인 귀국후 우여곡절 끝에 이뤄낸 경제적 안정은 동업자의 배신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결혼생활도 지속할 수 없어 양로원으로 향하는 주인공이 겪게 되는 삶의 경로는 한 인간의 의지나 신념을 지속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그래서 꺾일 수 밖에 없는 폭풍속의 한 그루의 작은 나무와 같다.

주인공이 살았던 스페인의 역사는 같은 시기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역사적 경로와 매우 비슷하여, 주인공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의 아버지들을 보는 것 같다. 지배자가 없는 이상적인 세상을 이룩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했던 수 많은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과, 살아남아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신념을 버려야 했던 또 다른 아나키스트들의 상실과 좌절이 가슴 깊이 전달되고, 동시대에 격동의 역사를 살아간 수많은 이름없는 이들이 똑같이 감내해야 했던 고단했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책이다.

아나키스트 :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인 아나키 상태를 만들려는 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