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기록물로써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이 퇴임후 5년간에 걸져 집필하였다.
임진왜란을 시간순으로 기록한 이 책은 임진왜란을 전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써 저자는 당시 영의정로써 전쟁을 지휘하고 국정을 이끌었으며 전란과 관련된 모든 정보와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류성룡은 이 책을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고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날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국가의 대신으로써 통렬한 반성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는데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류성룡의 이러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불과 30년만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발생하였으니 역사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된다.
임진왜란 발발전 약 2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평화를 구가하던 조선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으며, 일본이 침략의 징후를 보였음에도 아무런 방비를 하지 못했다. 결국 임진왜란 발발후 20일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두달여만에 평양까지 함락되는 동안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괴멸했고 장수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전 강토를 황폐화시키면서 7년간 지속되는 동안 국왕과 지배층인 사대부들 그리고 고위직의 장군들은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은 애국심과 군사지식, 무력을 겸비한 이순신, 김시민, 정문부, 황진 장군등의 승리와 이를 뒷받침해준 이름없는 수많은 군사들과 의병들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왜군의 퇴각이 더 알맞은 표현일 수도) 임진왜란으로 약 이십육만 명의 병력과 약 천만명으로 추정되던 조선 인구중 적게는 10퍼센트에서 많게는 50퍼센트까지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7년간의 전란을 그대로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백성들은 조선의 무능한 안보 태세로 인하여 왜군의 약탈과 살육은 물론이고 아군이라 믿었던 명군의 학살과 만행까지 온전히 겪어낼 수 밖에 없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 결렬로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을 보면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의 휴전을 선언한 것이 떠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대비하고 두려워 하고 올바른 지도자가 있어야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과연 또다시 우리에게 전쟁이 일어난다면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이 가장 고통을 받을 것이고, 가장 앞장서서 싸울 것이라는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를 수없이 지켜보았고,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다.
[징비록 본문에서]
"김수를 경상도 관찰사로, 이광을 전라도 관찰사로, 윤선각을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병기를 갖추고 성과 해자를 손보게 하였다. 특히 경상도에 많은 성을 쌓았다.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 좌우 병영에 속한 지역의 성을 새로 쌓거나 더 높이 쌓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시절이 지속되어 온 나라의 백성이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노역하는 것을 꺼려하며 원망하는 소리가 길을 가득 메웠다."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 이각은 적의 침입 소식을 듣고는 병영에서 나와 동래로 들어갔는데, 부산이 함락되자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각은 성 밖으로 앞뒤로 적을 협공하자는 핑계를 대고 성을 나가 소산역으로 물러나 진을 치려고 하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남아서 같이 성을 지키자고 하였지만 이각은 듣지 않았다."
"동래성이 함락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들은 적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군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밀양 부사 박진은 동래에서 밀양으로 급히 돌아가 작원의 좁은 길을 막고 방어하려고 하였다. 왜군은 양산을 함락시키고 작원에 이르렀는데, 수비대가 있는 것을 보고는 산 뒤를 따라 개미떼처럼 붙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좁은 길목을 지키던 수비대가 그것을 보고는 모두 흩어졌다.
박진은 말을 몰아 밀양으로 돌아가서 무기고와 창고를 불태우고는 성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각은 분주히 병영으로 돌아가 자신의 첩을 먼저 탈출시키니 성안의 인심이 흉흉해졌고 군사들도 하룻밤에 네다섯 번이나 놀랐다. 이각 자신도 새벽을 틈타 몸을 빼 달아나니 많은 군사들이 크게 무너졌다. 왜군은 길을 나누어 멈추지 않고 우리 군대를 추격하며 여러 고을을 연달아 함락시켰는데, 한 사람도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해 부사 서예원은 성문을 닫고 성을 지켰는데, 왜군들이 성 밖의 보리와 벼를 베어 해자를 메우고 순식간에 성곽의 높이만큼 쌓아서 성을 넘으 들어왔다. 초계군수 이아무개가 먼저 달아났고 서예원이 그 다음으로 달아나니 김해성은 결국 적에게 함락되었다.
순찰사 감수는 처음에 진주에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말을 몰아 동래로 가다가 도중에 왜군이 이미 상당히 접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경상 우도로 돌아왔다. 그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다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권유할 뿐이었는데, 이 때문에 경상도가 텅 비어 더욱 손 쓸 수 없게 되었다.
용궁 현감 우복룡은 고을의 군대를 이끌고 병영으로 가던 중에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 수백 명을 만났다. 이들은 방어사에 속한 군사들로 상도로 향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복룡의 군대 앞을 지나게 된 것이다. 우복룡은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그들을 붙잡아 반역을 일으키려 하다며 트집을 잡았다. 하양의 군사들은 병마절도사가 발행한 공문서를 보여주며 해명하였지만 우복룡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 하양 군사들을 에워싸고 모두 죽이니 그들의 시체가 들을 가득 메웠다. 순찰사가 이에 우복룡이 공을 세웠다고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우복룡을 통정대부로 승진시키고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에 임명하였다."
"조선은 개전 초기부터 일본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있었고 국왕은 의주까지 피난하여 여차하면 명나라의 속국이 되겠다는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이렇게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 회담은 결렬되었다. 히데요시는 재파병을 결정했고 이듬해인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명나라 도독 진린의 배가 위험에 처하자 적의 예봉을 자신의 함대 쪽으로 향하게 해 치열한 전투를 치룬 끝에 탄환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탄환을 맞은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전투가 급박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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