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책에서도 볼수 없는 세련된 어휘와 고급스런 문장, 깊이 있는 통찰력과 해박한 지식, 과거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후세에 끼친 영향을 바라보는 일관된 안목, 게르만족, 기독교, 이슬람, 페르시아, 십자군등 로마쇠망에 영항을 끼친 주변환경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적절한 평가등 이 책은 거대한 로마제국이 쇠망의 길을 걷게된 다양한 원인을 담고 있으며, 길었던 로마의 역사를 탁월하게 요약한 현존하는 최고의 서양 역사서라 할 만하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도시국가로 건국하여 5현제 시대인 2세기 무렵까지 성공과 확장을 거듭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동,서로 제국이 분열되고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도 1000여년간 존속한 (동)로마제국은 역사상 가장 오래 존속한 제국으로 유럽역사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데, 이 책은 로마의 전성기이며 저자가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라고 일컫던 5현제라 불리우는 네르바(96~98), 트리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117~138),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시기부터 시작되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는 1453년 까지의 로마제국의 역사를 담고 있다. 즉 로마의 전성기 시기로부터 멸망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고, 멸망에 기여했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일관된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저자는 로마가 쇠망한 이유가 다름아닌 "제국의 거대한 규모가 가져온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였다"라고 말하며,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느냐고 그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런 대제국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해야 마땅하다." 라고 말하고, 그러면서도 로마제국이 쇠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외부적 원인보다, 적들을 두렵게 만들던 군대의 기강 훼손과,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인들이 이방인들의 악행을 배우면서 로마제국이 성장하게 된 가장 큰 두가지 (물질, 정신적인)요인의 상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서를 한다면 반드시 기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이 책 한권으로 세계사의 중심인 유럽 역사, 유럽역사중에서도 핵심을 이루고 있는 로마역사를 한눈에 꿰똟어 보고 더불어 에드워드 기번의 품격있는 명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날카로운 지성과 박학다식을 갖춘 비평가인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혼미, 쇠락, 전도, 멸망을 기록한 모든 역사가들 중에서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성품은 정신의 절제와 언변의 자유를 절묘하게 종합했고, 그의 대화는 진지함과 재기발랄함을 두루 갖추었으며, 그의 문장은 웅건하고 화려했고 행간에는 우아한 조화로움이 흘러넘쳤으며 운필의 활달함은 그 기술의 교묘함을 감추고 있었다. 역사와 정치의 전환점에 대한 그의 관찰과 투시는 석축이든 철벽이든 뚫지 못하는 바가 없었다. 그는 56년 7개월을 살았고, 1794년 1월 16일에 영면하였다. 존 셰필드 경의 소망에 따라 이 묘지에 묻혔으며, 동 경은 그의 존귀한 친구이며 고매한 우인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이 비를 세웠다"
-에드워드 기번의 묘비명-
[로마제국 쇠망사 본문중]
역사는 인류의 범죄, 우행, 불운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사에서 사람들의 생존 조건이 가장 행복하게 번성했던 때를 들라고 한다면 마땅히 도미티아누스의 사망에서 콤모두스의 등극에 이르는 시기(96~180)를 들어야 할 것이다
세베루스 당대의 사람들은 평화와 안정을 누리면서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잔인한 조치들에 대해서는 용서했다. 하지만 이런 등치 원칙과 서례의 치명적 결과를 체험하게되는 후대 사람들은 세베루스를 로마제국의 쇠망을 가져온 주된 책임자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정당한 평가였다.(211년)
비록 명예를 희생시켜 평화를 유지했지만 로마인들은 그게 온전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더욱 분노했다. 로마제국이 부유하지만 안보는 허술하다는 위험한 비밀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251년)
로마제국 황제는 어떻게 처신을 했던간에 그 운명은 거의 비슷했다. 쾌락이든 미덕이든, 엄격함이든 온유함이든, 나태함이든 영광이든 그 무엇을 추구했건 그 결과는 하나같이 때이른 무덤이었다.
변방군의 사기는 차별의식 속에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전쟁의 고난과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는 그들이 궁정군이 받는 봉급의 3분의 2밖에 받지 못한다는 것은 치욕스런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탈영하거나, 바바리안들과 공모하거나 노략질 행위에 가담하는 변방군에게 가혹한 불과 칼의 징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햇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황제들이 변방군의 힘과 숫자를 회복하려 애썼으나, 제국은 콘스탄티누스가 그토록 무모하게 혹은 어리석게 입힌 치명적 상처 때문에 멸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시들어갔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죽고 120년이 흐른 뒤에 로마인들은 자신의 의무와 쾌락을 구분하지 않는 황제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권위와 능력, 행복과 미덕을 서로 결합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를 반대했던 기독교 종단조차 그가 평시와 전시에 발휘했던 고상한 정신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국가를 사랑했으며, 세상의 제국을 다스릴 자격이 충분했음을 고백했다.
두 황제는 봄이 오자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나이수스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메디아나 궁전에서 그들은 로마제국을 동서로 분할하는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렸다. 발렌티아누스는 동생에게 동방의 풍요로운 대행정구, 그러니까 도나우강 하류 지역에서 페르시아 접경에 이르는 지역의 통치를 맡겼다. 반면에 발렌티아누스 자신은 전쟁이 잦은 일리리쿰, 이탈리아, 갈리아 행정구를 맡았다.(364년 동서로마의 분할)
용감하고 뛰어난 수많은 장군들이 하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 손실은 일찍이 로마가 칸나이 전투(기원전 216년)에서 한니발에게 당했던 불운을 뛰어넘었다. 하드리아노플의 들판에서 전사한 로마 병력은 4만명으로 추산되었다.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에 자리 잡고서 한때 전 세계 사람들을 호령했던 민족을 통치하는 최초의 바바리안이 되었다.(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이 시기에 갈리아와 스페인에는 프랑크족과 서고트족이 수립한 강력한 왕국과 수에비족과 부르군트족이 세운 소왕곡들이, 아프리카는 반달족의 잔인한 박해와 무어인들의 야만스러운 모욕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일개 도시가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현상은 하나의 특이한 기적으로서, 철학적 역사가에게 깊은 사색을 요구한다. 하지만 로마의 쇠락은 제국의 거대한 규모가 가져온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은 부패의 원리를 숙성시킨다. 정복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파멸의 원인은 늘어난다. 시간의 경과와 우연한 사건의 발생이 인위적인 지지대를 제거하는 순간, 제국의 거대한 구조물은 그 자체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로마제국의 멸망스토리는 간단하다. 왜 로마제국이 멸망했느냐고 그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런 대제국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해야 마땅하다. 먼 곳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군단은 이방인들의 악행을 배웠고, 이어 용병들은 공화국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나중에는 자줏빛 황제 예복의 장엄함을 훼손했다. 개인의 안전과 공공의 평화를 초조하게 도모하던 황제들은 군대의 기강을 부패시키는 졸렬한 방편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기강이야말로 로마 군대를 황재들 자신은 물론이요 적들에게까지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힘이었는데도 말이다.
돈이 많이 드는 법률은 소송의 정신을 완화시킬 법도 하건만, 그 불공정한 압력은 부자들의 영향력을 높이는 한편 빈자들의 비참함을 더욱 악화시킨다. 방다하고 값비싼 소송의 결과, 부유한 소송자는 담당 판사의 우연한 부패에서 거둘 수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한 이익을 획득한다. 우리 영국과 우리 시대에 만연한 법률의 남용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울화가 치밀고 때로는 이런 정교한 법률 체계를 걷어치우고 투르크 재판의 간단명료한 즉결처분으로 대체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피핀의 대관식은 두 번이나 교황들의 재가를 받았고 교황의 가장 충실한 종이자 독일의 사도인 성 보니파키우스, 스테파누스 3세가 대관식을 집전했다. 그들은 생드니 수도원에서 후원자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독일의 지도자는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프랑크족은 옛날의 메로빙거 가문에 대한 맹세에서 벗어났다.
피핀은 이탈라이의 정복된 땅을 따로 떼어내어 합법적으로 교황에게 양도해줄 생각을 했다. 피핀은 그리스인의 항의에 이런 경건한 대답을 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구원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선물을 주었을 뿐, 여기에는 인간의 사소한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화려한 기부는 천상 세계에서 내려준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렇게 하여 세상은 처음으로 세속적 군주의 대권을 쥔 기독교 대주교를 보게 되었다. 교황은 자신이 지배하는 세속 영지를 확보했고 장관의 선임, 사법권의 행사, 세금부과, 라벤나 궁전의 부 등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754년)
우마이야 왕조의(661~750) 말엽에 이르러 아라비아 제국의 판도는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여행하는데 200일이 걸리는 거리였고, 지리적으로는 타르타리와 인도에서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했다.
노르만인이 무력으로 풀리아 교회를 로마의 관할권으로 돌려주자 비잔티움 총대주교는 안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떠나가는 풀리아 신도들에게 라틴인의 잘못을 회피하고 또 혐오하라고 경고했다. 위엄이 날로 높아지던로마 교회는 오만한 저항자를 도저히 참아줄 수 없었다. 케롤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한복판에서 교항 대사로부터 파문 선고를 받았다(1054년 7월 16일). 사절단은 먼지를 털고,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들어가 비잔티움의 치명적인 일곱 가지 이단죄를 나열한 다음에, 죄지은 교부들과 그들의 불행한 종파가 악마 및 악령과 영원히 한패거리가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파문장을 제단에 바쳤다.(동서 교회의 분열)
아테네와 로마의 고전들은 순수한 기호와 관대한 경쟁심을 촉발시켰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이어 프랑스와 영국에서 시가와 소설이 득세하고 난 이후에 사변적이고 실험적인 철학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었다. 그 빛에 의해 자연속의 만물이 새롭게 탄생했으며 바야흐로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천재는 성숙의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개인을 교육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백성을 교육시키는 데도 이성과 상상력의 힘이 확대되기에 앞서 먼저 기억에 의한 암기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선배들의 작품을 철저하게 모방한 이후에 비로소 그들과 동등해지거나 아니면 그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쌓게 되는 것이다.(14세기말~15세기 동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과의 교류결과로 그리스의 문학이 서유럽으로 전파됨)
마지막 순간에 무적의 투르크 근위병들이 힘차게 공격해왔다. 손에 철퇴를 들고 말 위에 올라탄 술탄은 근위병들의 용기를 관찰하고 판정했다. 그는 1만명의 친위 부대에 둘러싸여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하기 위해 그 부대를 남겨두고 있었다. 군진에서, 선단에서, 다리 위에서 오스만 대포들이 불을 뿜었다. 군영과 도시, 그리스인들과 투르크인들은 자욱한 연기 구름에 휩싸여 북, 트럼펫, 꽹가리에서 흘러나오는 군가 소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몸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압도적으로 중과부적이었다. 서로 엉켜 싸우는 병사들 사이에서 사령관 겸 군인의 임무를 다하고 있던 비잔티움 황제는 한동안 그 존재를 과시했으나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주위에서 싸웠던 귀족들은 마지막 숨이 떨어질 때까지 팔라이올루구스와 칸타쿠제누스의 명예로운 이름을 지키려고 애썼다. 황제의 구슬픈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내 목을 쳐줄 기독교도를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그의 마지막 공포는 이교도들에게 생포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절망 속에서도 신중함을 발휘하여 황제의 자의를 벗어버렸다. 혼전 중에 미지의 손이 그를 쓰러뜨렸고, 그는 시체 더미 아래에 파묻혔다.(1453년 동로마제국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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