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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독서

[추천도서/제 2차 세계대전 추천도서]얄타(세르히 플로히)

얄타회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책표지 속에 담겨진 저 사진을 언젠가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저 사진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서 열린 회담, 즉 얄타회담 중에 찍은 유명한 사진이다.

얄타회담은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미국, 영국, 소련 세나라의 거두가 제2 차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 전후처리등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열린 회담이다.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각 인물들의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이정도 무게감 있는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 회담에서 논의되고 결정된 많은 많은 사안들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회담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는데,

저자는 기밀이 해제된 미국과 영국의 문서와, 냉전 이후 새롭게 공개된 소련의 문서까지 포함하여 분석하고 8일 간의 회담을 이 책에서 재현해낸다.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일시적 동맹이었던 세 국가의 거두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회담에 임하는데

강력하고 독립된 프랑스의 부활
폴란드에서의 민주정부 수립
그리스에서 영국의 영향력 유지
독일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배상금 등을 통해
패권적인 단일국가의 부상을 막고 유럽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시키려는 전통적인 영국의 정책을 추진하려던 처칠

미국주도의 세계질서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국제 기구인 UN의 창설과 운영방법 확립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설득하려던 루즈벨트

독일로부터 정당한 수준의 전쟁 배상금
독일의 분할
폴란드에서 친소련 정권수립
극동에서 영토 획득과 영향권을 확보하려던 스탈린

그리고 이란과 터키,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루마니아에서 세국가의 이해관계, 포로문제 등의 의제를

뿌리깊은 정치적 문화적 차이와 상대방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합의로 마무리 되고

’장차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라는 얄타 정신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러한 합의로부터 탄생하게된다. 

그러나 전후 세계질서를 구축하고 독일 문제를 해결하게 된 이 회담은 후세에 의해 동유럽의 희생과 3년후 시작되는 냉전의 기초를 깔아 놓았다는 오명이 붙게되고 아직도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지만 이 회담의 진정한 의미는 그 당시의 맥락에서, 그리고 냉전 신화를 겹겹이 싸고 있는 껍질을 벗겨내야만 제대로 평가 될 수 있다’ 라는 저자의 주장은 합당하다. 얄타 회담의 진정한 의미와 그 중요성이 우리에게 인정되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듯 하다. 



[얄타 본문중]
루즈벨트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고, 처칠은 반공산주의에서 한발짝도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스탈린은 전쟁의 승자를 대중 선거에서 패배로 몰아 붙여 강등 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이 집권했을 때보다 국가의 더 유익한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민주주의의 본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얄타회담을 외교적 실패로 보는 시각은 초기 냉전에 대한 실망감에 주로 근거한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의 시각에서 보면 얄타 합의는 소련의 동유럽 장악을 막는 데 실패했고, 또한 소련이 만주에서의 영향권을 할당받아 중국에서 공산주의 자들이 승리할 수 있게끔 여권을 만들어 준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외교가 가능성의 예술이라면, 그리고 얄타회담 결과를 당시의 지정학적 군사적 상황에 따라 판단하면 서방 지도자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인정 받은 공로보다 훨씬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얄타회담이 전쟁 중에 열린 회담이라는 사실과 연합국측이 승리 하는데 소련에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이 종종 간과 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은 끝나려면 아직 멀었고, 승리를 얻기 위해서 방 지도자들은 소련군과 그 최고 사령관 아닌 스탈린이 필요했다. 특히 루즈벨트는 극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끝내고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데 소련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UN 창설에서 스탈린의 협력을 확보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전후 세계는 소련의 협력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