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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독서

[추천도서]자본Ⅲ-1(카를 마르크스)

 
자본은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 생산 이론, 2권 유통 이론, 3권 분배 이론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1권과 3권은 분량으로 인하여 분책되어 발간되어서 책으로는 다섯권으로 나뉘어 있다.

마르크스가 직접 완성하여 발간한 1권과 달리, 2권과 3권은 초고 형태로 존재하던 원고를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비교적 완성된 형대로 존재하던 2권은 엥겔스가 어렵지 않게 완성하였으나, 3권은 상당한 어려움 끝에 출간될 수 있었고, 4권으로 볼 수 있는 잉여가치학설사는 엥겔스 사후 카우츠키에 의해 발간되었다.
 
엥겔스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무난하게 완성된 2권과 달리, 3권은 마르크스가 남긴 단편적이고 불안전한 초고, 아직 정리 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남긴 메모들을

신체적 노화와, 다른 작업들과의 병행으로 인한 시간 부족 때문에 오랜기간에 걸쳐 완성된 3권은엥겔스가 정리하고 연결하여 하나의 책으로 발간었기에 엥겔스가 노력과 집념이 아니었으면 볼 수 없었을 책이다.
 
자본이라는 책은 서문 또한 하나의 작품이라고 불 만큼 훌륭한데 이 책에 나온 엥겔스의 서문 또한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만큼 논리력으로 무장한 훌륭한 글이다. 

분배이론으로 알려져 있는 3권은 2권의 책으로 나뉘어 있는데 극상을 보여주는 책의 난이도로 인하여 부득이 먼저 읽게된  Ⅲ-1권부터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 책은 크게 네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노동력에서 발생된 잉여가치와 이윤율의 관계,
즉 임금과 지급된 임금보다 더 많이 생산된 가치인 잉여가치와
지출된 총 자본과 잉여가치와의 비율인 이윤율,
이 둘 사이의 관계
그리고이윤율에 의하여 은폐되어 버린 노동으로부터 발생한 잉여가치 본질과 실상
 
개별 생산부분의 이윤율의 차이가 경쟁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의해 균둥화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이윤의 평균 이윤으로의 전화'
 
이윤율이 점차 저하되는 경항을 보여주는 자본의 속성,
하지만 자본의 증가에 의해 이윤량을 증가하는 현상
 
마지막으로 이윤이 이자와 기업가 수익으로 분할되는 원리
이윤이 자본의 소유자와 자본을 빌려서 운영하는 기업가 수익으로 분할되고,
그 과정에서 이윤율에 의해 한번 은폐된 잉여가치의 본질이 두 자본가들 사이의 분할 과정에서 완전하게 흔적조차 사라져버리는 현상
더 나아가 이자는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착취해내는 잉여가치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제 여기에서는 거꾸로 이자가 자본의 고유한 열매로 나타나고 이윤은 기업가수익의 형태로 전화하여 재생산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속물로 나타나며 자본 그 자체가 이자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현상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고 있다.
 
 
 
 
 
[자본 Ⅲ-1 본문중]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이윤율은 총 자본에 대한 잉여가치량으로 계산되므로 잉여가치 그 자체는 총 자본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결과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유기적인 구별은 이윤의 개념 속에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잉여가치 그 자체는 자신의 전화된 형태인 이윤 속에서 자신의 원천을 부인당하고 자신의 특성을 상실하고, 또 식별하기 어려운 형태로 은폐되어 버렸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해 나가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노동인구가 상대적으로 과잉이 될 가능성도 함께 커지는데 이는 사회적 노동생산력이 감소하기 때문이 아니라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윤율의 감소와 이윤량의 증가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은폐하기 위해 얼마나 교묘한 계산상의 왜곡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이 잉여가치의 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직접적인 목적이며 또 결정적인 동기라는 점이다.
 
생산방법 그 자체의 끊임없는 혁명을 통해서, 기존 자본의 끊임없는 가치하락을 통해서, 또 전반적인 경쟁을 통해서, 그리고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 생산을 개선해나가고 생산규모를 확대해나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통해서 관철된다. 따라서 시장은 끊임없이 확대되어야 하고, 글 결과 이들 간의 관련과 이들을 규제하는 조건은 점점 생산자와는 무관한 자연법칙의 모순을 띠어가고, 점차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되어간다. 이런 내적 모순은 생산의 외연적 확대를 통해서 스스로를 해소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것은 소비관계가 기초해 있는 토대와 점점 더 깊은 모순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이런 모순적인 토대 위에서 자본의 과잉과 인구의 과잉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요인이 함께 합쳐져서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양이 증가한다 할지라도, 이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조건과 실현되는 조건 간의 모순은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과잉생산이란 다름 아닌,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즉 일정 착위도로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생산수단의 과잉이다.
 
이자의 최저한계는 전혀 규정할 수 없다. 이자는 아무 수준으로나 하락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는 언제나 반작용이 일어나서 이 상대적 최저수준 위로 이자를 다시 끌어올리게 된다.
 
이자율은 공황기에 최고 수준에 도달하는데 이때에는 지불을 위해서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차용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바로 이 시기에는 이자율의 상승이 유가증권 가격의 하락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처분 가능한 화폐자본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자 낳는 유가증권들을 형편없이 싼 가격에 획득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조성된다.
 
따라서 그의 뇌리에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업가수익이 오히려 그 자체 임금이라는 생각, 즉 감독임금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때 또한 그의 생각으로는 이 감독임금이 임금노동자의 통상 임금보다 높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①그의 노동이 더 복잡한 노동이며 ②임금을 지불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로서 그의 기능이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고 그것도 가장 경제적인 조건에서 그렇게 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대립형태, 즉 자본가로서 아무 기능도 수행하지 않고 단지 자본의 소유주일 뿐인 자본가에게 이자가 돌아가는 반면 기업가수익이 자신이 사용하는 자본의 소유주가 아닌 자본가에게 돌아간다는 그 대립형태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이윤(잉여가치)에서 분할된 이들 두 부분의 대립형태 속에 파묻혀셔, 이들 두 부분이 잉여가치의 일부분들일 뿐이며 그런 분할이 잉여가치의 본성과 그것의 유래 그리고 그것의 존재조건 등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잊혀버린다.
 
이자는 두 자본가들 간의 관계이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관계가 아니다.
 
즉 이미 본 바와 같이 실제로 기능하는 자본까지도 그것이 기능하는 자본으로가 아니라 자본 그 자체로서 이자를 낳는 것처럼 스스로 나타난다.
이것도 다시 더 왜곡된다. 즉 이자는 이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이자는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착취해내는 잉여가치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제 여기에서는 거꾸로 이자가 자본의 고유한 열매로 나타나고 이윤은 기업가수익의 형태로 전화하여 재생산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속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