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8월 미국은 자국 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만주와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한 침공을 소련에게 요청한다. 독일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단련 되어 있던 소련군에게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손쉽게 제압 당하고 일본의 관동군을 섬멸하기 위한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의 북쪽 지역까지 진입 하게 된다.
소련군의 엄청난 기세에 놀란 미국은 부랴부랴 한반도를 북위 38도 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할하여 미국과 소련의 책임지역으로 나누는 안을 제시하고 소련은 이를 수용한다.
둘로 나뉘어신 남북은 각각 정부를 수립하게 되지만 두 진영 모두 한반도가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국전쟁 직전까지 38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1950년 결국 소련의 지원하에 북한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다.
한국전쟁은 민족의 비극이다.
전쟁중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국군과 유엔군 약 77만명과 북한군과 중공군 약 177만명의 전투인원의 피해와 더불어 민간인 남한 1백만명,북한 1백5십만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남북한 인구 약 3,000만 명 중 60% 이상인 1,900여만 명 정도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고, 남쪽 국토의 3분의 1이 초토화되었고 북쪽의 모든 건물중 85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고 불과 70여년전에 발생한 사건이면서 현재진행형인 한국전쟁에 대하여 학교에서 강제주입식으로 배운 기억은 제한적이다.
한국전쟁의 당사자는 반으로 갈라진 남,북한이었지만, 전쟁의 주인공은 미국과 중국이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무기, 연료, 탄약 그리고 경제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에, 결국 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의지, 전략,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전쟁 3일만에 남한의 육군이 괴멸되고, 4일만에 미 극동공군이 투입되어 인민군 공군을 제압하였음에도, 전쟁 10일만에 투입된 미지상군은 오산, 조치원, 평택, 천안, 대전, 영동, 상주등에서 잇따라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것은 미군이 인민군을 제압하지 못하여 벌어진 일이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인민군을 방어하고,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후방을 차단하면서 고립된 인민군을 소탕하고,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서 북한지역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미군의 능력과 의지였으며,
청천강, 장진호전투에서 갑작스런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선 이남까지 다시 후퇴하게 된 것도 미군과 중공군과의 대결의 결과이며, 휴전회담 약 2년여의 기간동안 끊임없는 고지전으로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킨 것도 미군과 중공군이 서로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싸움이었고,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된 것도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그 전쟁의 주인공인 미국과 미군의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다.
미국이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하기로 소련에 제안한 이유, 미국과 유엔 한반도 문제에 신속하게 참전하게 된 과정, 참전군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미군의 주요 전투에 대한 묘사, 미군과 미군 시스템의 장점과 약점, 한국전쟁과 관련된 의사결정의 배경이 된 미국의 정치적 상황, 전쟁포로 문제, 휴전회담 과정등을 통해서 당시 자유진영의 종주국인 미국이 이러한 수많은 결정을 하게 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전쟁에서의 사건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원인을 알아보는 것이지 논쟁거리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의 지면을 통해서 저자는, 전쟁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 즉 미국 정치인과 미국인들의 태도와, 이들이 전쟁과 관련된 결정들을 하게 된 역사적 사실과 과정을 있는 가감없이 보여주며, 결국 그러한 국가의 의사결정에 따라 머나먼 타국에서 명령에 따라, 이유도 모른채 죽어가야 했던 미군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 그러한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풀어내면서 그 당시 세계와 미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을 보여주면서 책속에 수 많은 명언을 쏟아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는 결국 이러한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리라.
또한 이 책을 통해서 불과 70여년전에 일어났던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한국 전쟁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전쟁 상황에 대한 지식을 높일 수 있으며,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크게 바뀌지 않은 미국이 한국이 바라보는 시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전쟁 본문중]
북위 38도 선을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미국과 소련의 책임지역을 나누는 임시 분할선으로 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 선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절차가 담긴 일반 명령 제1호에 포함되었으며, 이는 확인을 위해 전보로 런던과 모스크바에 전해졌다. 영국은 흡족해했고, 소련도 일단 좋다 는 답을 해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떠한 정책을 써서라도 공산주의 확산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 봉쇄전략은 미국의 국익에 매우 중요했다.
이 전쟁은 지금까지의 전쟁들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향후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이 전쟁은 어느 한 정부를 쓰러뜨리고 어느 집권 정당을 축출하는 첫 전쟁이 될 것이다.
한국은 더 이상 미국의 안보에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에서 철군하면 일본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컸고 실제로도 그랬다. 중국 국민당이 패망하는 상황에서 개입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미 극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위신에 큰 상처를 받았다.
공산군이 공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애국심에 불타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있었다. 모든 한국인들은 나라가 분단된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경무대에 앉아 있는 옹고집 노인인 이승만 대통령부터 남쪽 시골의 소작농까지 의견이 일치했다.
미국의 안보가 직접적으로 위협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세계에서 미국의 정치질서가 위협받고 있었다. 중국은 이미 적대 진영으로 사라져 버렸다. 중국을 잃으면서 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이동해버리자, 미국인 뿐 아니라 대담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정부의 많은 이들은 극도로 불안해 했다. 만약 대한민국을 잃는다면 일본은 그저 실 하나에 매달린 형국이 될 것이며 일본마저 잃는다면 미국은 다시 진주만 공습 직후의 상황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 강대국들이 전면전을 자제한다면, 미국 또한 이를 따라갈 방침이었다. 하지만 공산진영이 정치와 군사라는 장기판에서 강력한 한 수를 두었기 때문에 소련의 도막을 억제시키지 않고 계속 나아가도록 놔둬서는 안된다는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트루먼 정부는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을 막는 데 필요한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든 간에 미국과 세계의 최선의 이익에 맞게 행동했다.
미국은 1945년에는 미래 전쟁이 어떨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젠 장거리 폭격기와 항공모함만이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50년 7월 20일을 기준으로 인민군의 병력이 약간 우세했다. 7월 22일쯤에는 유엔군과 인민군의 병력 수가 비슷했다. 7월 말 무렵, 사실상 유엔군의 수가 인민군의 수를 압도했으며, 이 수적 우위는 이후로도 한 번도 바뀌지 않는다.
이 전쟁의 피해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금새 분명해졌다. 군대마다 돌파하고, 싸우고, 죽이고, 불태우면서 한국인 수십만명은 자신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 민간인을 다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지만, 민간인들은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국 민간인들이 다치더라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1950년 10월 1일 맥아더 원수는 북한에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무 답이 없었다.
10월 7일 정오, 미 8군 예하 부대들은 개성에서 38선을 넘었다. 한국군 부대들은 이미 수일 전에 38선을 넘어갔다.
외교부장인 저우언라이가 파니카에게 통보했다. "만약 미국 혹은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한국군이 단독으로 38선을 넘는다면 파병을 하지는 않겠다."
이제 중공군은 한국 전장에서 여러 번 입증된 실패를 보여주게 된다. 중공군은 방어선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기계화 되어 있지 않고, 공군력이 없으며, 신속한 통신 능력이 부족한 군대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진 군대에 맞서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1951년 2월 15일 지평리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둔화되었다. 이날 중공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초로 전술적 패배를 맛보았다.
1950년 12월 1일 이후 그때까지 아무 의문도 없이 꿈나라를 여행하던 동맹국들은 다시는 미국에게 도덕적인 이유로든 다른 이유로든 간에 전면적인 위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럽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소중했다. 유럽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힘을 반감시킨다면 주한 미군을 돕기 위한 어떤 방책도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유엔국의 회원국이 아니며 미국이 제공하는 무기, 연료, 탄약, 그리고 경제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한민국은 물리적으로 미국의 경제 정책에 영향을 미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해서 미국의 꼭둑각시로 남거나 죽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군대를 만들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이 군대가 지나치게 독립적이어서 독자적인 길을 걷거나 이승만이라는 지도자를 따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군 군단의 모든 포병과 전투력 대부분이 피로 물든 작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종군기자들의 '피의 능선'이라고 부른 이곳에서 한국전쟁의 새로운 패턴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교착상태에서 끔찍한 대량학살이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을 연상시켰다.
여러 증거들 중에 분명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미군 포로 중 50퍼센트가 사망했다. 영국군 포로의 사망률이 영국 정부의 큰 관심사였던 반면, 한국군 포로들은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터키군 포로는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
국무부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윤리적인 쟁점과는 상관없이 포로를 강제로 송환하는 것은 선전전에서 엄청나게 패배하는 것이며 이는 항복이나 마찬가지고, 미국이 스스로의 신념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아시아에서만 패배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안이었다.
한국에서 파괴되어나 수명이 다한 미군 차량 수천 대가 일본의 제작서에서 재생되었다. 많은 경우 세 번까지 재생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차량으로 대체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계약을 맺은 일본인들은 탄약, 공구, 장비를 포함해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극동사령부 소속의 한국군과 미군이 먹을 식량 수백만 톤이 생산되었다. 일본 경제는 전반적으로 호황이었다. 일본은 큰돈을 벌고 있었다.
중공군은 1951년 11월 판문점에서 체결한 협정에 따라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가치 없는 땅을 얻으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유엔군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가치 없는 땅에 병사들을 투입해 위험과 죽음에 노출시키는 것이 바보짓처럼 보였지만, 유엔군사령부는 누가 땅의 주인인가를 놓고서 중공군과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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