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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독서

[프랑스 혁명 추천도서]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 혁명 '회고록'(마리 루이즈 드 라로슈자클랭)

방데전역
출처 위키백과
생플로랑에서 루아르강을 건너는 부상당한 레스퀴르 장군(저자의 남편) [출처 위키백과]

방데 전쟁이란 1793년 3월 3일부터 1796년 7월 16일까지 프랑스의 방데 지역과 그 부근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이며 빅토르 위고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93년'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방데 지역은 낙후된 지역으로써 봉건적 의무의 비중이 프랑스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낮아 귀족과 사제 평민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하였고 구체제의 상징인 압제와 수탈등에서 상당부분 자유로웠다. 이러한 특수성은 성직자 탄압 등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질서에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혁명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 이념의 확산을 두려워한 주변국가들과 프랑스는 1792년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즉 대프랑스 동맹전쟁으로 1793년 프랑스에서는 30만 징집령이 선포되었고 이에 반발한 방데 지역을 비롯한 중서부의 농민들이 봉기하고, 그 지역의 귀족들과 일부 성직자들이 가세하면서 방데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 책의 주요 배경이기도 한 1차 방데전쟁은 1793년 3월부터 같은해 12월까지 이어졌는데, 전쟁초기 봉기군은 퐁트네, 소뮈르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8월 대반격을 선언한 정부군에게 10월 숄레전투, 12월 르망전투와, 사브네 전투에서 패하면서 9개월만에 소멸하게 되고, 그 이후로 1796년까지 방데 전쟁은 이어지지만 국지적이고 게릴라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의 집안은 프랑스 혁명 이전 고위 궁정귀족으로써 왕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자연스럽게 화려한 궁정생활을 누리며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귀족이었던 저자는 파리 민중들의 적이 되었고, 대부분 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왕과 왕비의 권유로 망명을 떠나지 않았고, 방데 지역과 인접한 고향인 푸아티에 지방으로 낙향하여 살게 되었다. 이 때에 방데 지방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저자의 남편인 레스퀴르 후작이 농민군의 지휘를 맡게 되면서 저자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지게 된다.

저자는 남편인 레스퀴르 후작과 같이 방데 전쟁에 참여하면서 보고 듣고, 직접 겪은 사건들을 이책에서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는데, 각종 전투에서 봉기군들이 처한 상황과 전투결과, 봉기군들의 내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하였고,

특히 10월 숄레전투 패배이후 패색이 짙던 봉기군의 절망적인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저항했던 모습, 사브네 전투 패배 이후 각지로 흩어져 숨어지내던 봉기군과 이들을 찾아내어 잔인하게 처벌하는 정부군의 모습은 정부군 포로 5천여명을 풀어준 봉기군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비춰지며,

가장 화려한 삶을 살다가 전쟁과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와 딸 셋을 모두 잃고, 두려움 속에 목숨을 연명하던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혁명으로 뒤바뀐 그 시대 귀족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후반까지 이어진 혁명과 반혁명으로 이어진 프랑스 역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세계에 널리 확신시키고, 현대의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확립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음이 틀림없지만, 이 시기의 프랑스인들이 겪었을 치열함과 참혹함,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투쟁하는 정신은 전세계인이 프랑스인들에게 진 빚이며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될 역사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프랑스의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으며, 방데 전쟁이라는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역사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회고록 본문에서]
계산, 질서, 신중함 등이 그들의 성공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미미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성공은 놀라울 뿐이다. 그렇지만 그 봉기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그것은 대규모 음모에 의해서 준비되었으며, 지휘관들은 능숙한 정치가들이었고, 사전에 수립된 대규모 계획을 집행했을 뿐이며, 농민들은 그들의 맹목적인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려한 설명이 사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전쟁은 공격적이라기보다 방어적이었으며, 지역의 안전 이상의 결과를 위한 계획이 세워진 적이 없었다.

혁명 사상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고 널리 퍼져 있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뜻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농민들과 상층 계급 사이의 감정이 이곳에서처럼 하나로 통합되어 완전한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