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1월 1일부터(음력) 노량해전으로 전사하기 이틀전인 1598년 11월 17일(음력)까지 기록한 일기로써 국보 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이며 임진왜란에 대한 사료로써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이순신 사후 200년이 지난 정조 때에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된 문적을 모아 발간한 충무공전서에 수록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 된 난중일기를 번역한 이 책은 원문과 같이 세로쓰기가 되어있어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두께에 비하여 여백이 많고 어려운 내용이 없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일기의 내용중 필수항목으로 보이는 부분은 그날의 날씨와 풍향, 그날 만났던 사람들이며, 그외에 전투에 대한 내용, 군법의 집행, 전쟁준비상태의 점검등 공적인 내용과, 어머님과 가족에 대한 걱정, 본인의 꿈 내용, 본인의 병세와, 마음속에 있는 생각등을 기록하였다.
이 책의 내용중 1592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첫 해전이 벌어지는 상황을 담고 있지만 6월 29일부터 섣달 그믐까지가 빠져있어 한산대첩등 주요한 해전에 대한 내용이 없어 다소 아쉽고, 사실상 해전이 없었던 1593년부터 1596년까지의 일기는 큰 사건이 없이 내용이 비슷하게 전개되며, 1598년은 정월 초닷새부터 구월 열나흘 까지 빠져 있어 명량해전 승리후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내용과 명나라의 진린과 관련된 이순신의 생각을 볼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오던 1597년 4월 1일부터 명량해전이 벌어지던 9월16일까지의 긴박하고 처절했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며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책을 읽기 전에 임진왜란에서 있었던 해전에 대한 일정과 이순신이 올린 장계, 전쟁의 진행상황등을 알고 읽으면 책의 이해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면 전쟁 발발부터 조선의 육군은 준비가 부족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하고, 장수가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며,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역을 포기하고 불리한 지역에서 싸우면서 패배를 자초하는 참담하고 비극적인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데 반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조선의 육군이 왜적에게 패하는 내용을 듣고 이순신이 통분함을 금치 못하는 부분과, 칠천량 해전직후의 상황 외에는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적을 압도하는 당당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어 징비록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순신과 조선의 수군은 이순신이 백의 종군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제외한 모든 전투에서 일본군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고, 승리한 모든 전투에서 이순신은 불굴의 용기와 의지, 탁월한 전략과 전술, 소홀히 하지 않는 정찰, 엄격한 군법 집행, 인자한 사령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의 대화이고, 글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소설책 또는 영화, 아니면 역사 수업시간을 통해 알고 있는 이순신은 23번 싸워 모두 이기고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기록한 위인이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많은 위인들중 조금 더 빛나는 한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일기를 읽음으로써 기록으로써의 이순신은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살아있는 존재로 바뀌며, 우리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나라를 위해 한몸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삶과 정신을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1594년 2월 1일(이책의 유일한 어머니의 말씀인데 팔순 노모임에도 불구하고 기백이 느껴진다) 맑음.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1594년 2월 5일 원수(권율)의 회답이 왔는데 심유격이 벌써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길이 없는 자들이라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고, 또 이렇게 빠져 들어가니 한탄스러운 일이다.(명나라와 일본의 화친에 대하여)
1597년 5월 5일 이날은 단오절인데, 천 리 밖에 멀리 종군하여 어머님 영연을 멀리 또나 장례도 못 모시니 무슨 죄로 이런 갚음을 당하는고.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백의종군으로 인하여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명절을 맞이하는 심정)
1597년 7월 16일 이희남을 시켜 칼을 갈게 했는데 아주 잘 들어 적장의 맨 대가리를 벨 만했다.
1597년 9월 16일(명량해전 당일 일기) 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을 행해 들어온다"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삼십여 척이 우리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두 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은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따해서 적을 쏘아라" 하고 여러 장수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 해도 적들이 더 대어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웟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나,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령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또는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치고 막다가 배 위의 사람이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자빠졌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명량해전 직후 선조의 반응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