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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독서

[추천도서]노예의 길/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프리드리히 A 하이예크)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시장개입은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겨두는 것보다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신자유주의, 그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하이예크의 이 저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4년에 발간되었다.

경제학자인 하이예크가 쓴 저서이지만 이 책은 경제학 책이 아닌 정치, 철학에 관한 저서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에서는 저자가 당시 적국면서도 가장 앞선 사회주의 국가로 평가하는 독일과 가장 대표적인 자유주의 국가였던 영국을 비교하며 사회주의 국가들이 필연적으로 쇠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하이예크가 이 저서를 집필할 당시만 하더라도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부유럽의 여러국가들이 사회주의 또는 전체주의 국가 였으며, 이 당시 영국에서는 2~30년전 독일이 사회주의 국가로 진입하던 시기의 정치, 경제적 주장들이 많은 지식인과 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로의 진행을 경계하고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를 하이예크는 이 책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당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계획경제와, 그 계획경제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을 밝히고, 그와 같은 경제계획은 경제 분야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경제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개인적 자유를 제한할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이예크는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계획경제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상당히 유사한 체제로 인식하고 있고, 이러한 체제에 대한 하이예크의 주장은 대체로 설득력이 있다. 나치 독일의 패망과 1990년대 소련의 붕괴로 하이예크의 주장이 증명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의 집필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면 하이예크가 왜 사회주의,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하이예크가 이 책에서 밝힌바와 같이 가난하게 출발한 어떤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작다는 점, 사람들이 긍정적 과제보다는 적에 대한 혐오, 더 잘사는 사람에 대한 질시와 같은 부정적 강령에 대해 더 합의에 이르기 쉽다는 인간의 본성, 자유주의 경제정책에서 심화될 수 밖에 없는 빈부 격차, 생산과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환경파괴 등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은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계는 전체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양 극단의 경제, 정치체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윤이 나지 않지만 필수적인 경제 분야에서는 국가가 개입하여야 하고, 경제적 빈곤층에 대하여는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등 하이예크도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의 장점을 취하고 있듯이, 경제를 운영하는데에 있어 우리가 한가지 철학과 논리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고 실제로도 그러한 국가는 드물다.

따라서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한 절충안을 채택함으로 인하여, 하이예크를 비롯한 특정한 사상가가 주장한 한가지의 주된 논리나 이론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주장한 이론이 온전하게 전면적으로 한번도 시도해 본 적조차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하이예크나 그가 비판한 마르크스 그외의 많은 사상가들중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하이예크가 이 책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비용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이 2차 세계대전 발발의 피할수 없는 원인이었다는 하이예크의 시각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될 예기치 못한 소득이다.




[노예의 길 본문중]
과거에는 어느 시기에도 경제문제에서의 자유가 없이 개인적, 정치적 자유가 있어본 적이 없다.

개인주의의 성장결과는 모든 예상을 초월하였다. 독창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라면 어디에서나 인간은 확대일로의 다양한 욕구들을 빠르게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생활수준의 향상은 사람들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게 하고, 더이상 이 어두운 면을 용납하지 않게 했지만, 아마도 생활수준의 일반적 진보로부터 충분히 혜택을 입지 않은 계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는 점점 더 사람들을 이것을 당연한 것처럼 간주하고, 더 이상 자유의 정책이 유지된 결과 획득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만약 우리가 소득분배를 현재의 사회정의 사상에 일치하게 하려면, 우리는 경제 활동을 중앙에서 지시하게 하여야 한다.

자유주의의 주장은 인간 노력들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경쟁의 힘을 가능한 한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것이지 그냥 그대로 놔두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유효한 경쟁이 창출될 수 있는 곳에서는 다른 그 어떤 방법보다도 경쟁이 개별적 노력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다.

단기적으로 선택의 다양성과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가격이 때로는 높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물질적 진보조차도 바로 이 다양성의 보존에 의존할 것이다.

개인주의의 입장의 본질은 바로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는 것, 즉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국각가 모든 수단을 통제하는 공공부문이 전체의 일정 비율을 넘어서게 되면, 국가행동의 영향은 전체 시스템을 지배하게 된다.

어떤 목적들이 지금 그렇게 상충되는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희생되어야 하는지, 한마디로 우리에게 선택가능한 대안들은 무엇인지와 같은 문제들은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 풀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전문가들만이 상이한 목적들 중 어느 것을 우선할지 결정할 위치에 있겠지만, 전문가들도 결국 계획대상인 공동체 위에 자신의 선호체계를 부과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의식적 통제를 진정한 합의가 존재하는 분야들로 한정시켜야 하고, 어떤 분야에서는 사태의 변화를 운에 맡겨두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비용이다.

권력을 자의적이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것은 권력의 '원천'이 아니라 권력의 '제한'이다.

그들은 더 이상 우월한 생산성 때문에 중앙계획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계획이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부의 분배를 확보해 준다는 믿음 때문에 이를 지지한다.

경쟁하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어떤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작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있지 않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누가 누구를 계획하고,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누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에서의 삶에서의 지위를 배분하고, 그리고 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할당된 자신의 몫을 가지는가? 이 문제들은 불가피하게 최고 권력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결정될 핵심적 문제가 된다.

우리가 완전한 평등으로 가는 모든 움직임이 바람직하다고 기꺼이 말할 수 없는 한, '더 큰 평등'이라는 원칙 속에 내재된 애매성은 계획자가 결정해야 할 질문들 중 어느 것에도 별 대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를 보존하려면 일정한 정도의 보장은 필요하다(심각한 궁핍에 대한 적절한 보장)

사람들이 긍정적 과제보다는 적에 대한 혐오, 더 잘사는 사람에 대한 질시와 같은 부정적 강령에 대해 더 합의에 이르기 쉽다는 것은 거의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경쟁 체제는 분권화를 통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을 최소화하도록 하는 유일한 체제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대개의 의문에 대해 이미 만들어진 견해를 받아들일 뿐이며, 또 어떤 한 신념체계를 본래 가지고 있었든지 아니면 남의 감언이설에 이를 받아들였든지 아마도 별 상관없이 만족할지 모른다. 어떤 사회에서도 사상의 자유는 정말 소수를 위해서만 직접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장 독점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오래 지속되거나 혹은 잠재적 경쟁을 무시할 수 있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