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11월 25일 홍타이지는 제신들을 이끌고 '조선정벌'의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었다. 홍타이지가 사용했던 제문은 일단 '심하전역 당시 조선이 명을 도와 침략해 온 것', 도망한 요민들을 받아들여 명으로 넘긴 것', '모문룡을 도왔던 것' 등을 지신이 정묘호란을 일으킨 원인으로 제시했다. 이어 병자호란의 이유로써 정묘호란이후 조선이 '누차 맹약을 어기고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삼을 캐도록 방치한 것', '도망한 요민들을 명으로 넘긴 것', 명에는 병선을 빌려주면서 자신들에게는 빌려주지 않은 것', '공경 등의 귀순 시에 명을 편들고 지신들을 돕지 않은 것', 용골대 도주 직후 평안 감사에게 보낸 유시문에서 정묘 화의가 부득이 하여 권도 차원에서 기미했는데 이제 대의로써 절교를 결단한다고 했던 것' 등을 조선 원정의 이유로 들었다.
병자호란은 1636년 갑자기 일어난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1627년 조선과 후금이 체결한 정묘화약이 이후 10년 동안 조금씩 균열의 조짐을 보인 끝에 파탄에 이르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정묘호란을 맞아 조선과 후금은 형제관계에 입각한 화약을 맺고 그것을 준수하겠다고 고천 맹서까지 했지만 이후의 상황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것은 조선과 후금 양측이 각자의 긴급한 내부 사정을 염두에 두고 당면 현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화약을 맺어 미봉했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 이전까지 인조는 대다수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척화론자이자 반청론자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인조의 태도는 돌변하었는데 1645년이 되면 아예 '인조가 청을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신하들을 늘 미워했다.' 기록이 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이 같은 인조의 태도는 호란 이후 청의 압박 때문에 흔들리고 있던 자신의 왕권을 부지하려는 '안간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급기야 소현세자가 급사하고, 강빈이 사사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게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로써 인식되었다. 하지만 왜란 이후 중국 대륙에서 후금이 부상하고, 그에 따라 명청교체가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이 언제까지나 일본을 외면하고 적대시할 수만은 없었다. 바로 이 같은 조건 속에서 조선은 내키지 않았지만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이다. 즉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북로남왜' 사이에 끼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의 불리함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의 압박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주장이 등장했다. 특히 조경은 일본을 우방으로 지칭하고 성신으로 교린하여 힘을 빌리자는 파격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것은 일본을 이용하여 청을 견제하자는 일종의 이이제이론이기도 했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조경의 주장에서는 병자호란 이후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청일 양국 사이에서 조선의 활로를 모색하려고 고민하던 조선 위정자들의 고뇌가 느껴진다. 나아가 병자호란이야말로 대일인식을 우호적이고 유화적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병자호란이 조선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와 고통은 참혹했다. 청군의 침략을 맞아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면서, 서울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여염이 불타고 시체가 즐비한' 참상과 함께 수십만이 포로가 되어 청으로 끌려가는 참극이 빚어졌다.
후금은 투항하거나 귀순해 오는 이신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포용했다. 그것은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는데 그 결과 이부상서 출신의 홍승주 같은 거물들조차 청조에 귀순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들중 문한능력을 갖춘 이신들은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청의 의도대로 끌고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부터 효종대까지 조선의 내정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무거운 공물 부담을 지웠던 청은 숙종, 영조대로 들어오면서 조선에 대한 정책을 관대한 방향으로 바꾸었다. 특히 강희제는 조선에 대해 한편으로는 관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이는 교묘한 수완을 발휘하여 조선을 순치시켰다. 조선 또한 청에 대한 반감이 줄어드는 등 인식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본문중]
정묘호란은 후금과 명나라와의 상호관계와 그들과 직접적으로 얽혀있던 조선이라는 약소국이 재조지은에 입각한 항명배금이라는 경직된 외교로 인하여 발생한 측면이 강하다. 정묘호란은 조선과 후금 양측, 특히 후금이 명과의 전쟁중에 조선의 완전한 복속보다는 적절한 시점에 화친하여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정묘호란의 이러한 화친은 조선으로서는 당장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날로 강성해지는 후금으로써도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의 화약이었기에, 결국 병자호란은 양쪽이 정묘화약을 절대적으로 지키지 않는 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병자호란 발발시 조선은 공성전의 방어전략을 수립하였으나 청군은 산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바로 진격하였고 곧바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인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큰 전투 없이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전쟁중 방치되었던 수십만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평생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다.
정묘 병자 호란을 통하여 후금은 배후의 위협 제거 뿐만 아니라 조선을 통한 부족물자 조달, 임진왜란 이후 우수성이 알려진 조선수군의 활용, 능숙한 조선의 조총수와 화포수 활용, 명의 번국인 조선의 이탈이라는 심리적인 측면까지 골고루 누리는 잇점을 얻었고, 그리하여 조선은 명의 멸망을 촉진하는데 일정부분 기여하였다.
이 책에서는 정묘 병자호란의 발생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밝히고 병자호란과 인조의 항복이후 조선의 청에 대한 인식변화의 조짐과 인조의 친청행보, 그리고 병자호란을 계기로 변화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인식 및 일본과의 관계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 순치과정과 숙종대에 이르러 느슨해지는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압박으로 운신의 폭이 넓어진 조선이 숙종, 영조, 정조 시기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큰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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