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 대중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의견’ 이다.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주권자가 국민이기 때문에 통치자가 그러한 여론에 따라 따라 통치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론은 대중 즉 주권자의 의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대중의 의견이 수많은 국가내의 현안중 어떻게 선택되어는지, 어떻게 공통된 의견으로 모아지는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민주주의 통치의 정당성과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여론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 책을 통해 본질과 한계를, 즉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의 제도에 대한 한계를 깨닫는다.
완전한 민주주의 제도에 가장 적합한 환경은 마을 또는 공장의 작업장 아니면 고대 아테네처럼 작은 집단이다.
이러한 작은 집단은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에 대한 정보 획득이 가능하고, 집단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정확한 여론의 형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집단의 범위가 커지고 현대 국가와 같이 수천만명이 살고 있는 국가에서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회 문제와 현안이 발생하면, 구성원들은 그것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모두 다 관심을 가질 수도 없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구성원들이 공유하게되는 이슈들은 수 많은 사안중 언론이 선택하고, 언론의 관점에서 서술된 사건들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고도의 통치행위 또는 민감한 사안일수록 현대 민주국가에서도 국가에서 제공하는 정보공개는 매우 제한적이다.
언론은 우선 제한적으로 공개된 정보를 바탕으로 뉴스를 만든다.
수많은 제한된 정보중 몇개를 선택한다.
그 언론인은 그 정보를 자신의 고정관념과 이해관계 또는 목적에 맞는 뉘앙스로 기사를 만든다.
대중들은 그렇게 제작된 뉴스를 보고 자신의 고정관념과 가치관에 따라 의견을 가지게 되고, 이것들이 모여서 여론이 된다.
결국 여론이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방향성이 주어진 사건들이 대중 각자의 고정관념에 따라 해석된 의견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듯이 대중이 읽는 뉴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뉴스 편집자의 행동방침을 내비치는 암시의 기운을 담고 있고, 대중이 듣는 보도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의 유형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착각한다.
'뉴스는 진리 또는 진실만을 보여준다'
'뉴스는 정확하다'
'뉴스는 공정하다'
'진리는 획득되는 것이아니라 영감을 받거나 폭로되거나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우리가 신뢰하고 우리를 기쁘거나 분노케 하는 많은 뉴스들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밝힌다.
무려 100여년 전인 1921년 당시 나이 32세의 젊은 저자인 리프먼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우리에게 해박한 지식, 적절한 사례와 비유, 충분한 논리적 이유, 신랄한 풍자와 유려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설명한다.
뉴스는 거의 언제나 작성자의 의도가 반영 된 것이라는 것
가끔 정확하고 진리에 가까운 뉴스라 하더라도 개인들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인하여 같은 사안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그러므로 민주적 의사 결정의 이론들은 모든 개인이 그에게 결정하도록 요구 된 문제들에 관해서 경험하고, 식견 있고 편견 없는 유권자를 가정한다는 전제는 애초에 달성 불가능 하다는 것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통치자들은 일단 선출이 되면 여론에 상관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그것에 따라 유권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음선거 때 아니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
이것이 현대민주주의 제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근대사회에 대한 뉴스의 질은 사회조직에 관한 하나의 지표라고 볼 수 있다"
[여론 본문중]
당신이 의견이 가반을 두고 있는 사실들을 당신이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자문해보는 것은 때로 매우 계몽적이다. 당신이 가진 의견은 실제로 누가 보고, 듣고, 느끼고, 계산하고, 명명했는가?, 당신에게 말해준 사람인가? 혹은 당신에게 말해준 사람에게 말해준 사람인가? 아니면 그보다도 더 멀리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사람은 얼마만큼이나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는가? 프랑스가 이러저러한 것들을 생각하낟고 그가 당신에게 알려줄 때, 그는 프랑스의 어떤 부분을 살펴보았는가? 그는 어떻게 그것을 살펴볼 수 있었는가? 그가 그것을 살펴보았을 때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프랑스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신문을 읽었고,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어디서 배웠는가?
어떤 시기이든 어떤 주제들에 관해서이든 무엇이 비밀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준을 설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기준을 받아들인다.
관찰자의 역할은 언제나 선택적이고 보통은 창조적이다. 우리가 보는 사실들은 우리의 지위와 눈의 습관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선 보고 그 다음에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정의부터 하고 그 다음에 본다.
우리가 어떤 사실들을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그 사실들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규범의 핵심에 놓여 있는 고정관념의 유형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의견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통해서 바라본 부분적인 경험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할 경우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반대자에게 관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미래와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실행되는 정책이 그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선뜻 믿겠지만, 정책의 결과로 나타나는 실제이 작동방식은 그들의 의견과는 상이한 논리를 따른다.
대중은 끊임없는 암시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시실은 모호하다. 대중이 읽는 뉴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행동방침을 내비치는 암시의 기운을 담고 있다. 대중이 듣는 보도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의 유형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겉만 번지르르한 지도자는 종종 영향력 있는 신무의 소유자가 실제 지도자라는 점을 발견한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지도자가 제시한 선택을 제대로 인식할 시간이 없거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채 동의해야 한다.
(국민)의 동의를 조작하는 일은 새로운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사라졌다고 간주되었던 매우 오래된 기교이다.
동의를 얻는 기교가 근본적으로 향상되기 전까지, 그런 진리는 공적인 문제에서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지연시킨다.
시민적 자유는 근대세계에서 여론을 보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민적 자유는 진리가 자발적이라거나, 어떤 외부의 간섭 없이도 진리를 보장하는 수단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거나 폭로되거나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라는 끈덕지게 지속된 케케묵은 믿음은 신문의 독자로서의 우리의 경제적 편견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사실과 인상을 보도할 것인가에 관한 엄청난 재량은 그런 재량이 공공성을 보장하기를 원하든 그것을 피하길를 원하든 간에, 그런 재량의 행사를 기자에게 남겨둘 수 없다는 확신을 모든 조직된 집단에 확고하게 심어준다.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가설은 뉴스와 진리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이 둘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근대사회에 대한 뉴스의 질은 사회조직에 관한 하나의 지표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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